1. 마우리아 왕조의 성립과 아소카 대왕의 즉위
마우리아 왕조의 시작
마우리아 왕조(기원전 321~185년)는 찬드라굽타 마우리아(Chandragupta Maurya)에 의해 창건되었다.
그는 당시 강력한 난다 왕조를 무너뜨리고 인도 최초의 통일 제국을 세웠다.
찬드라굽타의 손자인 아소카 대왕(Ashoka, 기원전 268~232년)은 마우리아 왕조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불교를 국가적 이념으로 채택하여 전파한 최초의 인도 황제였다.
아소카 대왕의 즉위와 초반 정책
- 즉위 초반, 아소카 대왕은 정복 전쟁을 통해 영토 확장에 집중하였다.
- 군사력을 바탕으로 인도 대부분을 통일하고, 남아시아 역사상 가장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였다.
- 하지만 이러한 정복 정책은 칼링가 전쟁(기원전 261년) 이후 급격히 변화하였다.
2. 칼링가 전쟁과 아소카 대왕의 불교 개종
칼링가 전쟁(기원전 261년)의 충격
- 칼링가(Kalinga)는 현재의 인도 동부 오디샤(Odisha) 지역에 위치한 강력한 왕국이었다.
- 아소카는 칼링가를 정복하려 했고,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엄청난 희생이 발생하였다.
- 전쟁에서 10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십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전쟁 후 참회의 개종
- 아소카 대왕은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후 깊은 충격을 받고 비폭력과 자비를 강조하는 불교로 개종하였다.
- 이후 그는 전쟁 대신 "다르마(Dharma, 법)"를 기반으로 한 평화적인 통치를 지향하였다.
- 즉위 초기의 군사 정복 정책에서 평화와 조화의 정치로 전환한 것이다.
3. 아소카 대왕의 불교 정책과 국가 종교화 과정
불교를 국가 종교로 지정
- 아소카는 불교를 제국의 공식적인 가치 체계로 삼고, 이를 국가 종교화하는 정책을 펼쳤다.
- 이는 단순한 종교 보호를 넘어 국가 운영 원칙으로 불교를 활용한 것이었다.
불교 승려 및 사원 보호
- 불교 승려들을 위한 국가적 지원을 제공하고, 제국 곳곳에 사원을 건설하였다.
- 스리랑카, 미얀마(버마), 중앙아시아, 심지어 그리스 지역까지 불교를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사회 개혁과 법령 제정
- 불교의 자비와 비폭력 정신을 반영한 정책을 시행하였다.
- 국민을 대상으로 한 윤리적 생활 지침(다르마 정책)을 발표하고,
이를 따르는 자들에게 경제적 지원과 사회적 혜택을 제공하였다.
4. 아소카 칙령과 불교의 국제적 확산
아소카 칙령(Pillars of Ashoka)
- 전국 각지에 불교 사상을 담은 칙령을 새긴 돌기둥과 암각문을 세웠다.
- 현재 80개 이상의 아소카 칙령이 발견되었으며, 대부분 팔리어(Pali)와 산스크리트어(Sanskrit)로 기록되었다.
불교의 국제적 확산
- 불교 전파를 위해 스리랑카,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그리스 지역까지 전도사를 파견하였다.
- 특히 아소카의 아들 마힌다(Mahinda)와 딸 상가미타(Sanghamitta)는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5. 아소카 대왕 이후 불교의 발전과 영향
불교의 황금기 도래
- 아소카 대왕 사후에도 불교는 쿠샨 왕조(Kushan Empire)와 굽타 왕조(Gupta Empire) 시기에 더욱 발전하였다.
- 인도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중국, 한국, 일본까지 불교가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 아소카 대왕 사후 마우리아 왕조는 점차 쇠퇴하였으며, 힌두교(브라만교)의 영향력이 다시 강해졌다.
- 결국 인도에서 불교는 약화되었으나,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 더욱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결론
아소카 대왕은 불교를 국가 종교로 정착시키고, 이를 기반으로 비폭력과 자비의 통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의 정책 덕분에 불교는 인도를 넘어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는 세계적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마우리아 왕조의 붕괴 이후 힌두교의 부흥과 함께 인도 내에서 불교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소카 대왕이 남긴 불교의 유산은 현대까지도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늘날에도 아소카 대왕의 불교 정책은 평화와 공존의 상징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유산이 어떻게 현대 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주제가 될 것이다.